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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절한 천재 음악인 유재하, 11월 1일 사망 유재하 프로필, 유재하 음반, 유재하 평가, 유재하 사랑하기 때문에, 별 같은 그대 눈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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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재하 섬네일

 

 

 

 

유재하 

 

▪ 25세의 짧은 생애 동안 단 1개의 앨범만을 남기고 떠난 싱어송 라이터

 

▪ 대한민국 대중음악사에 위대한 족적을 남기고 떠난 천재 음악가

유재하

출생


1962년 6월 6일 / 경상북도 안동군 풍천면 하회동 620


사망


1987년 11월 1일(향년 25세) / 서울특별시 용산구 한남동 강변북로


장지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모현읍 오산로 154-62(천주교용인공원묘원)


가족

아버지 유일청(1922~1989)

어머니 황영

3남 4녀 중 여섯째


학력

은석국민학교 졸업

삼선중학교 졸업

대일고등학교 졸업

한양대학교 음악대학 작곡과 음악학사


소속

위대한 탄생(키보디스트로 2개월 활동)

봄여름가을겨울(키보디스트로 6개월 활동)


종교

카톨릭

 

 

 

 

 

 

 

유재하 생애

 

▪ 1962년 6월 6일, 경상북도 안동군 풍천면 하회동(안동시 풍천면 하회 1리) 하회마을에서 유창물산 주식회사 사장을 지난 아버지 유일청과 어머니 창원 황 씨 황영 사이에 3남 4녀 중 셋째 아들(7남매 중 여섯째)로 태어남

 

▪ 이후 호적상 숙부 유시목에게 입양

 

▪ 태어난 곳은 안동이지만 성장한 곳은 서울

 

▪ 생전 서울 삼선동과 동숭동에 거주

 

▪ 1981년 한양대학교 음악대학 작곡과에 진학

 

▪ 전공은 순수음악으로 한양대 재학시절 과제로 제출을 위해 작곡한 곡을 보고 교수가 ‘아무리 급해도 모차르트를 베껴 오면 어떻게 하냐’ 고혼을 냈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로 음악에 천부적인 재능을 보였음

 

▪ 클래식 전공이었지만 대중음악에 남다른 관심을 보이며 작곡과 작사, 편곡 외에도 바이올린, 첼로, 피아노, 기타, 키보드등 여러 악기의 연주에도 능통했음

 

▪ 대학 졸업을 앞두 1984년 클래식과 재즈를 대중가요에 접목하는 음악적 지향점을 세움

 

 

 

 

 

 

 

본격적인 음악인으로의 활동

 

▪ 한양대 재학중 조용필과 위대한 탄생 키보디스트로 본격적인 음악 활동을 시작

 

▪ 당시만해도 순수음악 전공의 경우 가요계에 활동하면 퇴학을 당할 정도로 보수적인 시대여서 카메라에 절대 잡히지 않는 조건으로 그룹활동을 시작했으나 조용필 일본 공연 동행에 필요한 학교의 허가를 바디 못해 2개월 만에 위대한 탄생에서 탈퇴함

 

▪ 한양대학교 졸업 후 군복무를 마친 유재한 1986년 김현식과 '봄여름가을겨울'에 키보디스트로 입단함

 

▪ 라디오 스타에 김현식 특집에서 '봄여름가을겨울' 멤버들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3집을 준비 중이던 기면식이 멤버들에게 곡 좀 써오라고 하니까 유재하가 그때까지 자신이 썼던 자작곡 10여 곡을 가져다주었다고 함

 

▪ 김현식은 형편성 논란으로 멤버당 한 곳씩만 넣는다고 하자 유재하가 삐져서 6개월 정도만에 '봄여름가을겨울'을 탈퇴했다고 밝힘(당시 김현식이 선택한 곡이 유재하 1집 수록곡이기도 한 명곡 ‘가리어진 길’)

 

▪ 탈퇴후에도 김현식과 유재하는 술친구로 잘 지냈다고 전해짐

 

▪ 김현식 본인도 본인 3집 앨범 발매 후 앨범을 선물할 때 ‘사랑하는 동생 배신자 친구 재하에게’라고 농담 삼아 앨범에 싸인을 남겨 줬다고 전해짐

 

 

 

 

 

 

 

유일한 앨범

유재하 유일한 앨범 1집 '사랑하기 때문에'

 

▪ 1986년 11월 봄 여름 가을 겨울 밴드 탈퇴 후 800만 원을 들여 자신이 전 곡의 작사, 작곡, 편곡을 한 솔로앨범 ‘사랑하기 때문에’를 제작, 1987년 8월 서울음반을 통해 발매함

 

▪ 앨범은 당시 유재하가 사랑했던 한 여인과의 러브스토리를 주제로 제작

 

▪ 유재하의 생전 절친이었던 피아니스트 김광민에 의하면 유재하 노래에 등장하는 여인은 단 한 명이고 유재하의 초등학교 동창이고 초등학교 졸업 후 연락이 끊겼지만 성인이 된 후 재회했음

 

유재하 1집에서 플룻을 연주한 이가 바로 유재하가 사랑했던 여인이라고 말함

 

▪ 유재하의 앨범은 악기 편성과 리듬, 코드 진행, 형식, 편곡에 가창까지 앨범의 모든 콘셉트와 제작을 주위의 도움 없이 혼자 다 해냈음

 

▪ 특히 일반적인 대중가수, 연주가들은 할 수 없는 클래식 관현악 오케스트레이션까지 직접 해냈는데 드럼, 베이스, 오케스트라 반주를 제외한 피아노, 키보드, 기타 등 스스로 연주할 수 있는 모든 악기를 자신이 직접 연주하고 녹음함

 

▪ 지금도 일반적으로 작사, 작곡, 가창을 하는 싱어송라이터들은 많지만 유재하처럼 프로듀싱이 가능하면서 대중적 인정을 받은 아티스트는 매우 드물다는 게 현실

 

▪ 위에서 언급한 클래식 음대 학생들이 대중음악을 하게되면 퇴학당하는 분위기는 실제로 한양대 작곡과에 재학 중이었다가 1982년 MBC대학가요제에서 ‘잃어버린 우선’으로 동상을 수상한 가수 우순실도 학교로부터 제적통보를 받았다는 사실을 비춰보면 당시 대한민국 대중가요가 받던 차별은 현실이었음이 증명된 셈

 

▪ 당시 대한민국은 클래식이나 팝송은 고상한 문화예술로 인정받는 반면 가요는 대중오락의 일종으로 질 낮은 음악으로 치부했기 때문에 유재하의 이런 행보와 노력은 당시에는 고상한 예술을 포기하고 질 낮은 딴따라가 되는 것과 마찬가지의 의미로 받아들여졌음

 

▪ 오늘날 유재하가 천재로 불리며 대중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것은 대중음악을 금기시하던 클래식 음악계에서 대중음악에  대한 시선까지도 바꿔놨을 정도로 클래식과 대중가요의 접목 및 신선하고 다양한 시도를 앨범에 시도했기 때문임

첫 앨범이 나왔을때 대부분의 음악평론가들은 특이한 앨범 정도로만 치부했음

 

▪ 당시만해도 라디오나 TV 가요 프로그램에 출연하기 위해서는 PD들에게 사전 테스트를 받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는데 당시 테스트에서 가창력 미달이란 이유로 번번이 테스트에 통과하지 못해서 방송 출연에 제약이 있었고 이로 인해서 실제 유재하가 방송에 출연한 영상이 젋음의 행진 단 하나라는 점이 매우 안타까울 따름임

 

▪ 방송출연과는 달리 청취자들이 요청하는 신청곡 비율에서는 압도적으로 높은 인기를 모으기 시작함

 

▪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당시 최고의 라디오 프로그램이었던 MBC라디오 이문세의 별이 빚 나는 밤에 주간 신청 엽서와 방송 횟수를 집계해 가요 순위를 정하는 별밤 차트란 코너에서 유재하의 ‘지난날’이 장기간 1위를 질주했음

 

 

 

 

 

 

 

평소 유재하 성격

 

▪ 아름다운 여성들에게는 무척 수줍어하고 조용한 인상이었다는 증언이 있음

 

▪ 반면 친하게 지내던 사람들에 따르면 술이 조금 들어가면 말이 많아지고 쾌활해지는 성격이었다고 전해짐

 

▪ 술만 마시면 말이 많아지고 피아노가 있는 술집에 가면 끝도 없이 즉흥 연주를 계속해 주인이 나가라고 할 정도였다고 함

 

▪ 김현식의 소속사 사장이자 유재하를 데뷔시킬 뻔했던 동아기획 김영 사정은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유재하는 개그맨처럼 밝고 쾌활한 타입이라 소개했고 잘 생긴 얼굴은 아니지만 주변 사람들이 처음 보면 바람둥이 같다는 표현을 쓸 정도로 여성들에게 많은 인기를 끌었다고 밝혔음

 

▪ 친한 누나관계였던 가수 한영애는 유재하는 늘 대중과 소통하고 싶어 했으며 팬레터 답장을 쓰느라 밤을 꼬박 새울 정도로 팬들의 사랑에 목말라 있었다고 했음

 

▪ 그리고 '봄여름가울겨울'의 리더이자 유재하의 친구였던 김종진은 유재하의 꿈 중 하나가 방송 중 무대 위에 올라가 피아노를 쳤을 때 '오빠~! '소리를 듣는 것이었다고 함

 

▪ 주변인들을 통해 유추해 본다면 유재하는 관종끼가 있던 천재 음악인, 아직은 때가 묻지 않은 순수한 음악인이었지만 가슴속에는 야망이 꿈틀거리고 있던 천재 청년 음악인 정도로 정의할 수 있을 것 같음

 

 

 

 

 

 

 

안타까운 사망

 

▪ 1987년 10월 31일 오후 5시 30분, 날이 어둑 해질 때쯤 유재하의 2살 터울 형은 당시 수술 후 집에 있었고 유재하는 형에게 ‘형 잠시 나갔다 올게, 가수 됐다고 동창이 찾아왔는데 빨리 해치우고 올게’라는 말을 남기고 평소 잘 나가지 않던 동창회에 나갔음

 

▪ 다음날인 11월 1일 새벽 술에 취한 친구가 몰던 현대 포니 2를 얻어 타고 집에 돌아오던 중 용산구 한남대로 근처 강변북로에서 중앙선을 침범하며 마주 오던 택시와 정면충돌하는 바람에 현장에서 즉사함

 

▪ 음주운전을 하던 친구 성모 씨도 이 사고로 숨졌으며 유재하 유족들은 음주운전자의 아버지 성씨와 충돌한 택시 업체인 한도콜택시를 상대로 4억 1,600여 만원의 손해배상을 청구했고 1988년 8월 3일 서울민사지법 합의 15부에서 ‘승용차를 모는 친구가 술에 취한 것을 알고도 같이 동승해서 사고가 났으면 피해자도 50%의 과실이 있다’며 피고 성씨는 유 씨 가족에게 4,460여만 원을 지급하라는 판결을 받음

 

▪ 당시 사고는 1집을 발매한 지 약 2개월의 지난 시점이었고 1집 앨범에 대한 반응이 조금씩 오고 있던 시기였음

 

▪ 유재하는 자신의 작업물인 1집에 대해서 부끄러워하며 2집 앨범을 기획하며 다음에는 좀 더 나은 앨범을 만들어야겠다는 열의를 불태우고 있던 시점이었음

 

▪ 생전 유재하를 친동생처럼 아끼던 이문세는 '별이 빚 나는 밤에'를 진행하던 중 유재하의 사망소식을 전해 듣곤 오열하며 관련 소식을 전했다고 함

 

▪ 유재하는 이문세에게 1집, 3집 수록곡 그대 내 품에, 그대와 영원히 두 곡을 만들어 줄 정도로 친분이 두터웠음

 

 

 

 

 

 

 

사후 평가

 

▪ 유재하 사망 후 라디오에서는 청취자 신청곡으로 유재하의 ‘지난날’, ‘사랑하기 때문에’가 연이어 울려 퍼졌으며 생전에 받지 못했던 인기를 사후에 받으면서 지금까지 요절한 대한민국 천재 음악가로서 이미지를 구축함

 

▪ 유재하는 단순히 요절한 젊은 가수가 아님

 

▪ 현재 대한민국 발라드의 기준이자 한국형 발라드의 문을 연 선구자로 평가받고 있음

 

▪ 음악평론가 임진모는 대한민국의 발라드는 이영훈에 와서 문이 열리고 유재하가 창작과 작곡, 편곡의 세계로 발라드의 지평을 울렸다는 식으로 평가함

 

▪ 김영대 평론가도 당시에는 매우 생소한 9th코드등 여러 화성학적 디테일을 발굴해 내고 모던함을 연 ‘모던 발라드’의 선구자라고 평가함

 

▪ 2021년 SBS의 전설의 무대 아카이브 K에서도 유재하는 한국형 발라드 계보의 시초이며 발라드에 팝적 요소를 가미하고 단조 대신 장조 코드를 유행시키고, 브리지 부분을 도입한 것을 높게 평가했음

 

▪ 대한민국 대중음악사는 유재하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는 말이 나오는 이유가 바로 이런 유재하의 음악적 시도 때문이며 당시에는 매우 드물었던 클래식 작곡과 출신답게 그의 음악은 기존의 대중음악과 완전 다른 괘를 갖고 당시 뽕끼라 불리는 요소가 완전히 삭제된 현대의 발라드 음악의 시초를 유재하는 본인의 앨범을 통해 최초로 시도했기 때문임

 

 

 

 

 

 

 

후배가수들에게 끼친 영향

 

▪ 신승훈 (가수)

- 유재하를 너무 좋아해 유재하를 추모하기 위해 자신의 데뷔일을 그의 사망일인 11월 1일로 잡음

 

▪ 김광진(가수-더클래식)

- 1991년 발표한 자신의 첫 독집에 ‘너를 위로할 수가 없어’를 유재하에게 헌정, 두 번째 독집에서 다시 리메이크해서 수록함

- 1997년 유재하 10주기 추모 앨범에서 더클래식 박용준의 편곡으로 가창함

 

▪ 김동률(가수)

- 평소에도 유재하의 죽음으로 한국 발라드계열 음악은 100년 퇴보했다고 말함

 

▪ 이규호(가수, 작곡가)

-자신의 하나음악을 통해 1999년 발표한 첫 독집 음반에 유재하를 기리는 마음을 담은 자작곡, ‘영원한 길’을 수록함

 

▪ 이적(가수-패닉)

- 작곡, 작사, 음악을 대하는 자세 등 거의 모든 부분에서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가수 중 하나가 유재하라고 밝힘

 

▪ 유영석(가수-푸른 하늘)

- 유재하에 대해서 놀라움, 질투, 존경을 한 번에 느낀다고 밝힘

 

▪ 유희열(가수-토이)

- 클래식 음대를 진학하게 된 계기가 유재하라고 밝힘

 

▪ 정재형(가수-베이시스)

- 한양대 작곡과에 진학한 게 유재하 때문이라 밝힘

 

▪ 윤종신(가수)

- 라디오 스타에서 '이 사람의 노래를 듣고 음악을 하겠다고 마음먹었고 마음속의 라이벌로서 그를 따라가려고 했지만 특히나 작사는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다'는 이야기를 했음

 

▪ 이상은(가수)

- 유재하 노래를 상당히 좋아해서 특히 라디오 방송 같은 데서 '사랑하기 때문에', '내 마음에 비친 내 모습' 등을 자주 부르곤 했음

- 이문세가 이상은에게 ‘내 노래 중에 어떤 곡을 제일 좋아하냐’고 이상은에게 물어본 적이 있는데 '그대와 영원히(유재하 곡)'라고 답했음

 

▪ 박선주(가수)

- 보이싱에서 유재하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함

 

▪ 김형석(작곡가)

- 한양대 작곡과 후배이자 유명 대중음악 작곡가인 그도 유재하 1집을 듣고 감명을 받아 클래식 음악에서 대중음악으로 진로를 바꿨다고 함

 

 

▪ 가창력은 크게 부각되지는 않는 편인데, 오죽하면 당시 유재하가 음정 불안 등의 이유로 가창력 미달이라고 방송 출연을 못할 정도였으니...

 

▪ 그러나 이는 당시 방송사의 병크라고 볼 수 있는데, 유재하가 무슨 고음을 탄탄하게 내는 그런 스타일의 가수는 아니었지만, 그 특유의 순수하고 담백한 음색은 오늘날까지도 독창적이라고 호평받고 있음

 

▪ 그렇기에 그의 곡들은 가창력이 아무리 좋더라도 쉽게 따라 부르 긴 어렵다는 평을 받음

 

▪ 애초에 친형이 밝혔듯 유재하의 꿈은 가수보단 프로듀서였고, 특히 늘 같이 묶이는 가수가 유재하처럼 젊은 시절에 요절한 동시에 가창력으로 호평을 받는 김현식과 김광석, 그리고 신해철이라 좀 더 대비되는 면이 없지 않아 있기 때문으로 해석됨

 

 

 

 

 

 

 

유재하음악 경연대회

유재하 경연대회 포스터 모음

 

▪ 1988년 유재하의 아버지 유일청이 아들이 남긴 1집 앨범 수익금과 자신의 재산을 출연하여 유재하 장학 재단을 설립

 

▪ 1989년부터 재능 있는 신인 음악인 특히 싱어송라이터들을 발굴하기 위해 유재하 음악경연대회를 개최하기 시작함

 

▪ 2005년에는 재정 문제로 중단됨

 

▪ 2006년에 싸이월드의 후원으로 재개됨

 

▪ 2013년 역시 스폰서를 구하지 못해 경연대회 개최가 힘들었으나, 100명에 가까운 이른바 '동문(역대 수상자들)'의 힘을 모아 겨우 개최가 가능하게 됨

 

▪ 2014년부턴 CJ문화재단이 후원을 시작, 2018년도부터는 공동 주관사로 대회 운영을 함께하고 있음

 

▪유재하 음악경연대회는 그동안 많은 음악인들을 배출함

 

▪단순히 음악인이 아니라 한국 음악계의 최전선에서 활동하고 있는 인물들도 많아 그 라인업이 자못 화려함

 

▪조규찬, 방시혁, 루시드폴, 유희열, 이규호, 나원주, 정지찬, 심현보, 김연우, 정준일, 임헌일, 노리플라이, 오지은, 박원, 박세진, 고찬용, 스윗소로우, 홍이삭 등이 대표적 인물이며 여전히 현재진행형.

 

 

 

 

 

 

 

관련 음반

 

▪ 유재하 1집 ‘사랑하기 때문에(1987년 서울음반)

 

▪ 유재하 '유재하를 추모하는 앨범 1987 다시 돌아온 그대 위해'[tribute](1997, 서울음반)

 

▪ 유재하 '사랑하기 때문에 Remastering'(2014, 킹핀엔터테인먼트)

 

▪ 유재하 - 유재하와 라흐마니노프 / 유재하를 추모하는 앨범 2017(2016, 1000 FACE)

 

▪ 유재하 헌정앨범 ‘유재한 30년, 우리 이대로 영원히’[compilation omnibus](2017)

 

▪ 유재하 Alive Part.3-1 - 유재하 편 [digital single] (2022, 유재하음악장학회/선인장미디어/킹핀엔터테인먼트)

 

▪ 유재하, 빅마마 Alive Part.3 - 유재하 편 [digital single] (2022, 선인장미디어/카카오엔터테인먼트)

 

▪ 유재하 탄생 60주년 ‘사랑하기 때문에 [Special Vinyl Edition] (2023, 킹핀엔터테인먼트)

 

유재하 ‘별 같은 그대 눈빛’ [digital single] 발매 예정 (2024년 11월 7일)

 

 

 

유재하 '별 같은 그대 눈빛' 42년만에 유재하 목소리 담긴 음원 최초 공개 5월 24일 공개연기 11월

유재하는 누구? ▪ 1987년 25세라는 젊은 나이에 요절한 대한민국 음악가로 대한민국 대중음악사에 위대한 족적을 남기고 떠난 천재 음악가입니다. ▪ 대한민국 발라드의 기준이자 한국형 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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